카테고리 없음

여름궁전(Summer Palace), 젊은 날 격정으로의 애수

fervour12 2013. 12. 17. 01:26

오늘은 중국 영화 한 편. 원제는 頤和園(이화원). 유명한 서태후의 여름 별궁이다. 2008년 학회로 중국에 갔을 때 구경간 적이 있다. 규모에 놀랐지만 아름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궁전. 특별히 좋았던 것은 창랑(长廊) 정도일까. 긴 복도를 따라 천장과 벽에 그려진 그림과 그 앞에 펼쳐져 있던 인공호수가 아름다웠다. 다만 그림들이나 건축물이 섬세하게 느껴지지 못해 안타까웠달까... -_-;; 중국도 북경, 장강, 심양, 텐진 등등에 가 보았지만  한국이나 일본의 문화재들에 비해 섬세함이 부족한 듯 느껴졌었다.

 

 

조선족 마을 투먼에서 홀아버지와 애인을 두고 북경으로 대학을 가게 된 위홍(레이하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던 그녀에게 자유분방한 성격의 리티(후링)가 다가오고 그녀를 통해 알게된 저우웨이(구오샤오동)와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게 되면 될수록 그가 자신을 떠날 것이라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위홍. 불안감에 스스로를 광기로 몰아넣는 그녀를 보고 저우웨이는 결국 이별을 선언한다. 하지만 그의 주변을 맴돌며 방황하는 위홍. 그러던 어느 날 둘도 없는 친우라 여겼던 리티가 저우웨이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일어난 천안문 사태.

 

 

 

친구의 배신과 천안문 사태를 겪으며 마음이 갈갈이 찢긴 위홍은 학교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리티는 먼저 베를린에 가 있던 오랜 남자친구 뤄구의 도움으로 저우웨이와 함께 독일로 떠난다. 천안문 사태라는 역사적 상처가 강제로 봉합되었듯 그들 역시 상처를 숨긴 채 역사의 물결에 몸을 실어 부초처럼 떠돈다. 그들에게 북경은 여름날 쉬어가는 별궁과 같은 곳이었다.

 

전체적인 느낌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비슷하게 느껴졌다. 격정의 시대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중심이 되지 못한 어둡고 음울한 주변인들의 이야기. 영화의 전개방식이나 구도는 초기 왕가위 감독을 떠올리게 했다. 

 

썩 마음에 드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여주인공 역의 레이하오에게 감탄을. 위홍의 그 복잡한 감정선을 잘도 표현해 냈다는 느낌. 그리고 59회 칸 영화제에 유일하게 초대된 아시아권 영화였으나 이 영화로 인해 로우예 감독은 5년 간 중국에 입국 금지, 영화촬영도 금지를 당해 가족과 강제로 헤어져 미국에 체류하게 되었다고 한다.

 

격정적사랑... 전에도 써 먹었는데 여기에도 딱 부합하는  듯 하다... 내 주변에도 있었던 위홍들... 그녀들이 지금 행복할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는 듯 하다. 노희경 작가의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의 그녀처럼.

 

내가 아는 한 여자,
그 여잔 매번 사랑할 때마다 목숨을 걸었다.
처음엔 자신의 시간을 온통 그에게 내어주고,
그 다음엔 웃음을 미래를 몸을 정신을 주었다.

나는 무모하다 생각했다.
그녀가 그렇게 모든 걸 내어주고 어찌 버틸까,
염려스러웠다.

그런데,
그렇게 저를 다 주고도 그녀는 쓰러지지 않고,
오늘도 해맑게 웃으며 연애를 한다.
나보다 충만하게.

그리고 내게 하는 말,
나를 버리니, 그가 오더라.
그녀는 자신을 버리고 사랑을 얻었는데,

나는 나를 지키느라 나이만 먹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자신에게 사랑받을 대상 하나를 유기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속죄하는 기분으로

이번 겨울도 난 감옥같은 방에 갇혀,
반성문 같은 글이나 쓰련다.